여권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세쿼이아를 이끌던 마이클 모리츠가 은퇴 뒤 처음 한 일은 부모의 과거를 파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이 웨일스의 부엌에서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그 침묵이 어떻게 한 투자자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그는 스티브 잡스에게조차 경외감을 느낀 적이 없는지.
이 대화엔 숫자가 거의 없다. 대신 두 할아버지가 있다. 국가와 연금을 믿고 남은 판사와, 앞을 못 보면서도 제 힘으로 벌던 소 장수. 한 사람은 동쪽으로 실려가 사라졌고, 한 사람은 전쟁이 터지기 72시간 전에 나갔다.
모리츠는 그 갈림에서 자기 인생의 규칙을 읽어 낸다. 도망칠 구멍을 늘 두라는 것, 사람을 볼 때 열네 살까지를 캐물으라는 것, 그리고 대부분이 침묵할 때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것. 투자 얘기는 뒤쪽에 나오고, 오히려 그래서 더 잘 들린다.
두 할아버지
모리츠의 친할아버지는 바이에른의 하급 판사였다. 1차대전에 나가 베르됭의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고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국가를 믿는 사람이었다. 국가가 주는 안전을 믿었고, 1933년에 직장을 잃고 나서도 폭풍은 언젠가 지나가리라 믿었다. 연금이 있었다. 그에게 연금은 생존의 수단이었다.
"눈이 멀었던 건 아니에요.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을 리 없죠." 모리츠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다만 공무원이라 천성이 보수적이고 신중했고, 국가는 결국 버틴다는 믿음이 컸습니다. 그 모든 게 겹쳐서 떠나기를 미루게 만들었어요. 너무 늦을 때까지." 떠난다고 마음먹어도 장벽이 많았다. 받아 줄 나라를 찾아야 했고, 출국 비자를 얻으려면 나치 정부에 큰 세금을 내야 했다. 친할아버지 부부는 결국 동쪽으로 실려 갔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외할아버지는 다른 천으로 짠 사람이었다. 소 장수. 독일에서 유대인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젊어서부터 시력이 나빴고 모리츠가 만났을 땐 완전히 실명한 상태였는데, 그런 몸으로 북서부 시골 마을에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돌이켜보면 훨씬 길거리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기업가 기질이 있었고, 국가 연금을 받으려고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죠. 늘 제 힘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는 아내와 함께 빠져나왔다. 전쟁이 터지기 72시간 전에.
도망칠 구멍
부모는 수용소에 가지 않았다. 1930년대에 독일을 벗어났다. 그래서 '생존자'라는 말을 꺼렸다. 그 말은 수용소를 살아 나온 사람의 것이라고 여겼다. 대신 자기들은 난민이었고, 난민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모리츠는 1960~70년대 웨일스에서 유대인 난민의 아들로 자랐다. 난민은 정의상 소수자이고, 웨일스의 유대인 난민은 그 안에서 또 소수자였다.
"지금 사람들은 저를 보고 '늙은 백인 남자네, 소수자는 아니지' 하겠죠.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남이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본인이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예요." 부모가 과거를 이야기해 준 건 아니었다. 큰 줄기야 알았지만 세부는 이 책을 쓰려고 앉기 전까지 몰랐다. 전해진 건 이야기가 아니라 태도였다. 매일의 행동, 사건에 반응하는 방식, 파멸이 멀지 않다는 감각. 끔찍한 일이 한 번 일어났으니 일상을 헤쳐 나갈 때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공기.
살아남는다는 건 잔꾀로 사는 것이고, 남의 동기를 의심하는 것이고, 나쁜 일이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미리 재는 것이다. 그게 모리츠에게 남긴 건, 당시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추진력과 근성이었다.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갖지 못했을.
"가족사에서 제가 얻은 교훈은 하나입니다. 불이 너무 뜨거워지면 갈 곳이 있어야 한다는 것. 여권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지금이 특히 그런 때냐고 패트릭이 묻자 짧게 답한다. "네." 미국과 서유럽은 소수자에게 불편한 곳이 됐다. 아시아인이든 무슬림이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다만 반유대주의에 대해선 투덜대는 게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2,500년 된 겁니다. 2026년에도 2030년에도 안 사라져요. 오래전에 그냥 삶의 사실로 받아들였고, 솔직히 그게 저를 더 강하게 만들었어요."
그가 미국을 보는 단순한 틀은 이렇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총을 가진 백인 기독교인뿐이다. 나머지는 정도만 다를 뿐 불안하다. 이민단속국에 쫓기든, 경찰이 지키는 예배당에 가든. 영국도, 극우 정부가 들어선 프랑스와 유럽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다. 수천만 명이 뒤처졌다고 느끼는 경제적 고통의 시기에, 그 절망은 권위주의 성향의 지도자 손에서 쉽게 끔찍한 국물이 된다.
그래도 낙관을 강요하면? 오르반이 쫓겨났다. 몇 해 전만 해도 잘나가던 사람이다. 곳곳에서 중도로 돌아가려는 힘이 보이고, 그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것이다. 미국은 다가오는 중간선거와 그 뒤 18개월이 다음 10년의 삶을 결정한다. 지난 10년엔 한 사람의 지문이 찍혀 있었으니까. 영국의 패라지는 "최고의 날이 이미 지났을지 모른다". 프랑스의 르펜과 내년 선거는 다르고, 스페인도 독일도 다를 수 있다.
인터넷이 극단을 보상해 온건함을 어렵게 만드느냐는 질문엔 "세 글자로 답하면 yes". 인쇄술 이래 모든 새 매체가 그랬지만, 인터넷과 휴대전화는 거짓 밈을 훨씬 쉽게 퍼뜨린다. 1930년대 독일에서 라디오가 뜨자 전파가 극단 선전과 인종주의, "자주 반복되는 큰 거짓말"로 채워진 것의 확대판이라고.
열네 살까지
모리츠가 창업자를 만나면 열네 살 이전의 삶을 캐묻는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 방법을 어디서 얻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뜻밖에도 디트로이트를 꺼낸다. 타임지 특파원 시절, 동료와 함께 크라이슬러에 관한 책을 썼다. 정확히는 1970년대 말 크라이슬러를 살려 낸 남자, 한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영자였지만 이제는 이름 발음조차 헷갈리는 사람, 리 아이아코카에 관한 책이었다.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에서 자란 아이아코카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아웃사이더라는 감각을 드러냈다. 포드에서 헨리 포드 2세를 비롯한 기득권층은 늘 그를 의심의 눈으로 봤다. 다들 어느 시점엔가 이민 온 집안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훨씬 더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이아코카는 끝내 안에 들어갔다고 느끼지 못했고, 그 모든 게 어린 시절에서 왔다는 게 또렷했다. 세월이 갈수록 그는 포드에서 최고 자리를 못 받은 일까지 이탈리아 이민자로 보인 탓으로 해석하게 됐다.
그러니 스무 살, 스물한 살짜리 창업자를 만나면 어린 시절을 묻는 건 자연스럽다. "쉰 살 때 얘기를 물을 순 없잖아요." 아웃사이더의 에너지가 나이 들면 빠지느냐는 질문엔 고개를 젓는다. "사람은 거기서 졸업하지 않아요. 10대 후반과 20대, 어쩌면 30대 초까지 어떤 강도로 일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 강도가 줄어들 뿐이죠. 안쪽은 안 변합니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강도가 변할 뿐."
즐겨 쓰는 질문이 있느냐고 묻자 하나를 든다. 지난 삶에서 딱 한 가지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느냐. 세쿼이아 면접에서 이 질문을 받고 울음을 터뜨린 사람이 있었다. 히스패닉 이민자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미국에 온 걸 자랑스러워했고, 아들이 영리해서 학교 성적이 좋은 걸 자랑스러워했다. 열두 살쯤, 친구와 동네 가게에서 사탕을 훔쳤다. 아버지를 아는 가게 주인이 일렀고, 아버지는 아들 귀를 잡아끌고 가게로 돌아가 사과시키고 주머니를 다 비우게 했다. 가족에게 수치를 안겼다는 부끄러움이 수십 년 뒤 면접 자리에서 그대로 터져 나왔다.
패트릭당신의 답은요? 뭘 바꾸시겠어요?
모리츠인터뷰를 잘하시네요. 사람들은 보통 답을 안 듣거든요. 부모님과의 일들입니다. 책을 쓰면서 부끄러웠어요. 지울 수 있다면 부모님과 있었던 몇몇 순간을 지우고 싶습니다. 열여섯, 열일곱까지 함께 살았고, 젊었을 때 그분들과의 만남이 다르게 흘렀기를 바랍니다. 그분들이 누구인지 제가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돌아갈 수는 없죠.
패트릭아이라면 누구나 겪는 독립 욕구였을까요?
모리츠그것도 있었겠죠. 오만도 있었고. 그분들이 무엇을 겪었고 무엇이 그분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었습니다.
안나, 그리고 침묵하는 사람들
1920~30년대 뮌헨의 중하류 가정엔 집안일을 돕는 사람이 있었다. 세탁기도 청소기도 없던 시절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사람은 자연히 유모가 됐다. 모리츠의 아버지와 삼촌에게 그 사람이 안나였다. 가톨릭 신자였고, 나중에 그 집을 떠나 바이에른의 철도 노동자와 결혼했다. 부부는 제 손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모리츠 가족을 잊지 않았다.
1930년대, 시골 바이에른에서 유대인을 휴가 손님으로 들이는 게 몹시 인기 없는 일이 되었을 때, 이 부부는 조부모와 아버지, 삼촌에게 집을 열었다. 가능한 한 오래. 두 사람은 나치에 질색했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와 삼촌은 곧바로 바이에른으로 돌아가 안나를 찾았고, 그 인연은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어린 모리츠도 그 집에 묵었다. 나치의 유령이 사방에 서린 집에서.
"야드 바셈에서 전쟁 중 유대인을 도운 사람들에게 붙이는 말이 있죠. 의인. 안나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남이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윤리적 나침반을 가진."
여기서 그는 12년쯤 전에 본 프랑스 드라마 얘기를 한다. 2차대전 중 한 프랑스 마을의 삶을 여섯 편에 걸쳐 그린 작품. 어떤 이는 가능한 한 오래 점령에 저항했고, 대부분은 침묵했고, 일부는 나치의 적극적 협력자가 됐다. 코로나 시절, 열 명씩 작은 화면에 박힌 긴 줌 회의를 하면서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며 속으로 묻곤 했다. 이 사람이 1940년대 그 마을에 살았다면, 침묵했을까, 저항했을까, 협력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들 잘 아는 사람들이라 누가 안나 같은 척추를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은 늘 소수였다.
한 번도 잘한다고 느낀 적이 없다
언제 처음 내가 뭔가를 정말 잘한다고 느꼈느냐. 패트릭이 좋아하는 질문이다. 모리츠의 답은 질문을 무너뜨린다. "그런 적이 없어요. 거짓 겸손이 아닙니다." 지금도요? "네." 증거가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다들 의심에 시달리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좋은 일을, 성공을 축하하는 게 자기에겐 몹시 어렵다고. 그건 결점이라고.
왜 그러냐는 물음에 그는 유산이라고 답한다. 어머니는 재앙이 늘 모퉁이 너머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 아침 식탁의 화제는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들은 어딘가의 자연재해나 비행기 추락이었다. 어머니는 코로나가 오기 몇 주 전에 돌아가셨다. "어떤 면에선 안됐다고 느꼈어요. 평생 예언하던 그 재앙을 놓치셨으니까. 코로나를 사기당하신 거죠." 그 감각, 벼랑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감각이 그에게 남았다.
자기 작품에 자부심을 느낀 적은? "늘 미완성이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완벽한 적이 없었어요. 만족한 순간이 없죠." 그림을 그릴 때 10년, 15년 전 그림과 비교하면 나아진 길이 보이긴 한다. 그러다 MoMA나 메트에 가면 "하찮은 점으로 줄어든다". 자기가 후원한 사람들, 글로 다룬 퍼거슨 같은 지도자들에게 자부심을 느끼느냐는 물음에도 아니라고 한다.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건 호기심의 항해였고,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그들이지 구경꾼인 자기가 아니다.
"제일 큰 에너지를 준 게 뭐냐고요? 가족이고 아이들입니다. 아내 해리엇과 저는 아들이 둘인데 이제 30대고, 한 녀석은 손주가 둘 있어요. 깊이 개인적인 것들이죠."
비 오던 겨울, 플리트 스트리트
대학을 나온 모리츠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50년 전 얘기다. 당시 영국의 큰 신문들, 플리트 스트리트의 신문사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노조 규칙이 길을 막았다. 노조는 편집국이 대졸자를 바로 뽑지 못하게 했다. 열여섯 살 고졸을 뽑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타임스나 파이낸셜타임스, 텔레그래프에 가려면 지방 소신문에서 2~3년을 보내야 했다. 하기 싫었다. "조급했고 야심이 있었고, 뭐 그런 거죠."
그때 빌 디즈를 만났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편집국장이자 영국 언론의 존경받는 인물, 젊어서는 이블린 워의 풍자소설 『스쿠프』의 등장인물 모델이 됐던 사람이다. 모리츠가 보낸 구직 편지에 디즈는 친절하게 답했고, 플리트 스트리트의 사무실에서 30분을 내줬다. 겨울이었고 비가 왔다. 조언을 구하자 디즈는 자기가 젊었을 때 했더라면 싶은 일을 말했다. 미국에 가는 것. 그리고 모리츠에게 가라고 했다. "그 말이 제일 결정적이었어요. 그게 저를 이 방향으로 밀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첫 행운은 타임이었다. 학교를 갓 나온, 경력이 전혀 없는 스물두셋 청년을 뽑았다. "50년 전 그 조직은 그런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어요. 그게 첫 번째 큰 기회였습니다."
잡스와 타임, 그리고 경외감
타임에 들어가고 두세 해 뒤, 샌프란시스코 지국에서 일하던 모리츠는 휴직계를 내고 애플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다. 잡지에는 애플의 비공개 시절을 다 담을 지면이 없었고, 그게 그가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타임에서 전화가 왔다. 스티브 잡스 프로필에 기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훗날 아주 유명해진, 연말 표지 인물 자리에 컴퓨터를 앉힌 그 호였다. 타임 역사에서 사람 아닌 물건을 그 자리에 올린 건 그때뿐이었을 것이다.
잡스는 자기가 '올해의 인물'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도 확인해 준 적은 없었지만. 더 나쁜 건 프로필 자체였다. 잡스는 그 글을 싫어했고, 모리츠 말로는 "정당한 이유로" 그랬다. 모리츠도 다른 이유로 경악했다. 당시 타임의 원고는 "편집이라는 콤바인"을 거쳤다. 들어간 짚과 나온 더미가 별로 닮지 않았다. 글의 톤은 악의적이고 비열하고 뒤가 구렸다. 그 일이 타임을 떠난 이유 중 하나였다. "슬프게도 그 뒤로 스티브와의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패트릭그에게 경외감을 느끼셨나요?
모리츠아니요.
패트릭누구에게든 경외감을 느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모리츠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알게 된, 놀라운 일을 해낸 사람들은 동시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가까이서 알게 되면 그 면도 보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경외하기가 어려워요. 업적과 미덕과 함께 결함도 보이니까.
패트릭왜 스티브에겐 아니었죠? 우리 세계에서 살아 있는 기억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경외한 인물인데요.
모리츠조심스럽게 말할게요. 존경했습니다. 엄청나게 감탄했고요. 제가 결코 해내지 못할 일들을 해냈다는 걸 잘 알았습니다. 다만 그의 어두운 색조를 좀 알았기 때문에, 순수한 찬탄의 대상으로 올려놓기가 어려웠어요. 물론 영웅적인 인물이죠.
한 가지에 미친 사람들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편집증적 몰두는 어떤 역할을 하느냐. 음악이든 책이든 그림이든 회사든, 그 하나에 완전히 사로잡혀 세상을 닫아걸고 불필요한 산만함을 전부 없애는 것. 모리츠는 그게 만드는 힘이라고 본다. 물론 대가가 있다. 사람들이 다친다. 가족과 친구에게 줄 시간이 없다. "그래도 가끔 거기서 위대한 게 나옵니다." 주된 대가가 관계냐고 묻자, 그렇다고 한다. 혹은 다시 산다면 다르게 살았을 거라는 느낌.
그는 한 문장을 기억한다. 좋은 예술의 가장 큰 적은 현관에 놓인 유모차라는 말. 그가 이블린 워의 말로 소개한 이 문장은 흔히 시릴 코널리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화가 프랭크 아우어바흐 얘기를 꺼낸다. 나치 독일에서 온 난민이었고,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으며, 미국에선 마땅한 인정을 못 받았지만 앞으로 2년 안에 주요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린다. 모리츠는 그를 조금 알았다.
아우어바흐에겐 정해진 모델들이 있었다. 같은 사람들이 30~4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앉아 줬다. 모델 중 하나는 베니스에 살면서 매주 런던으로 날아왔다. 앉아 있는 게 치료 같았다고들 했다. 모델이 늦으면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풍경화도 같은 풍경을 몇 번이고 다시 그렸다. 아들 제이크가 있었지만, 예술 말고 다른 것엔 시간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 곁에 있으면 힘이 나느냐고, 자기 같은 잡식성 인간보다 그쪽이 좋으냐고 패트릭이 묻는다. "섞여 있는 게 좋아요. 하나의 돛대에 자기를 묶은 사람도, 느슨하게 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도." 다만 한 가지는 어렵다고 했다. 좋아하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곁에 있는 건 늘 더 힘들었다고.
돈 밸런타인이 기자를 뽑은 이유
1985년 무렵, 세쿼이아는 지금 두 사람이 앉은 스튜디오 탁자 하나면 전 직원이 둘러앉을 만큼 작은 회사였다. 모리츠는 기자였고, 벤처에 흥미가 생겨 당시 하나같이 작았던 벤처 회사 다섯 곳에 편지를 썼다. 이메일이 아니라 진짜 편지를. 다들 시간을 내줬고, 다들 같은 말을 했다. 기술 배경이 없다. 공학 학위도 없다. 실리콘밸리 회사에서 일한 적도 없다. 기자였으니 홍보나 마케팅 쪽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돈 밸런타인만 달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기술 회사에서 큰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 벤처에 들어와 별 성과를 못 내는 걸 봤고, 반대로 엉뚱한 배경으로 투자자로 성공한 사람들도 알았다. 메이필드 펀드를 만든 토미 데이비스, 보험 계리사 출신의 누군가. 그리고 누구보다 아서 록. 얼마 전 백 번째 생일을 맞은 그 사람. 뉴욕의 작은 부티크 헤이든 스톤의 은행가였던 록은 1950년대에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창업과 자금 조달을 성사시킬 배짱이 있었고, 1960년대엔 텔레다인과 헨리 싱글턴, 사이언티픽 데이터 시스템스를 도왔으며, 인텔의 첫날 투자자이자 회장이 됐고, 몇 해 뒤 애플에 투자했다. "돈이 말했어요. 이 사람 배경엔 성공을 예고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밸런타인에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모리츠는 웃는다. "돈은 가르치는 걸 믿지 않았어요. 생존주의자였죠. 사람을 깊은 물에 던져 놓고 익사하는지 보는 걸 믿었습니다." 대신 관찰하고 들으며 배웠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반도체 산업의 부상에 큰 역할을 한 피에르 라몽도 영향을 줬다. 그 한복판에 있으면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벌어지는 걸 보고 천천히 제 의견을 만들어 간 것이다.
그때, 1980~90년대
- 정보가 불완전했다. 가까이 있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 플레이어가 적었다. 투자할 사람과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모든 게 벌어지는 단 한 곳, 그 한복판에 떨어졌다
- "제정신인 열네~열여섯 살이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
지금
- 15~16년 전부터 사라졌다. 전 세계가 같은 정보를 본다
- 개인, 두세 명짜리 회사, 거대 뮤추얼펀드까지 몰려든다
- 중개자가 너무 많아 관계가 끼어들 틈이 없다
- "오늘 벤처에서 내가 잘할 자신은 없다"
기술도 경력도 없는 기자가 최고의 초기 투자자가 됐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 주느냐는 질문에, 그는 자기 성공을 오늘로 옮겨 놓지 않는다. "그때 벤처와 지금 벤처는 아주 다릅니다. 평행선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생태계가 건강하냐고 묻자, "창업자라면 꽤 괜찮죠."
망치지 말 것
1995년 세쿼이아를 맡을 때 머릿속엔 뭐가 있었나. "망치지 말자." 그게 첫 번째였다. 1995년의 세쿼이아와 그가 물러난 2012~13년의 세쿼이아는 아주 다른 회사였다. 두 번째는 거기서 일하는 모두가 우리는 다음 투자만큼만 좋은 회사라고 느끼게 하는 것, 과거의 영광에 기대지 않는 것. 세 번째는 새로 열리는 시장을 잡는 것. 실리콘밸리가 여전히 최고의 자리이긴 해도 스타트업 활동에서 차지하는 몫이 줄어들자, 먼저 이스라엘로, 그다음 중국으로 갔고, 아주 다른 사업인 세쿼이아 헤리티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잔다르크처럼 들리고 싶진 않다면서 하나를 더 보탠다. 투자자에게 제대로 하는 것. 세쿼이아의 출자자 대부분은 비영리 기관이었다. 성과를 못 내고도 두둑이 보수를 받는 사업엔 있고 싶지 않았다. "금융 서비스업 전반의 오래된 문제가 그거예요. 회사는 잘됐는데 고객은 인덱스펀드에 넣은 것만도 못한 경우." 패트릭이 더그 리오니에게 들은 얘기를 꺼낸다. 10년 가까이 싸워서 원금까지 되돌려 놓은 그 펀드. "투자자들에게 '우리랑 좋은 시절 많이 보내셨죠, 이 펀드는 돈이 안 되는 걸 받아들이세요'라고 할 수도 있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문제였어요."
자기와 아주 다르게 생겨먹은 더그와 어떻게 그렇게 일했느냐는 질문엔 한 단어. "관용." 팀으로 일하려면 주변 사람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뭐가 그들에게 중요한지 이해하고 그걸 채워 줘야 한다. "지금이라면 25년, 30년 전보다 훨씬 잘할 겁니다." 그걸 배운 곳이 뜻밖에도 축구 감독과 함께 쓴 책이었다.
퍼거슨은 각 선수를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거칠고 혹독하다는 평판은 부당하다고 모리츠는 말한다. 그런 면도 있었지만, 그는 사랑받고 싶지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선수들에게 존중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캄캄한 시기에, 뱀의 배보다 낮게 가라앉았을 때 곁에 있었다. 베컴이 월드컵에서 퇴장당하고 영국 언론이 그의 '멍청함'을 무자비하게 두들길 때, 퍼거슨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어깨에 팔을 둘러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카메라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그런 작은 일들은 기사에 안 나온다.
모리츠가 대필한 그 책의 초고를 세쿼이아의 홍보 담당자에게 보여 줬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당신이고 어디부터가 퍼거슨인지 모르겠어요." 모리츠의 답. "바로 그겁니다."
위인, 일론, 그리고 AI
역사를 만드는 건 위대한 개인인가, 오래가는 제도인가. 모리츠는 망설이지 않는다. "저는 위인론의 신봉자입니다." 아이아코카든 잡스든 일론이든, 정치든 전장이든, 결국 위대한 지도자의 문제라는 것. 물론 수천만 명 위에 수십 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끔찍한 권위주의자들도 있다. 좋든 나쁘든 개인은 주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좋은 쪽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걸 해내도록 남을 설득한다.
일론이 오늘의 대표적 사례냐는 물음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산업가일지도 모른다"고 답한다. 논란이 많은 인물인 건 알지만 역사의 눈과 투자자의 눈으로만 보겠다면서. 영국 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는 표현이 있는데,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여러 산업에서 그만한 걸 이뤄 낸 규모에 입이 떡 벌어진다고. 그 점이 그를 남과 갈라놓는다고.
AI 도구가 지렛대를 키워서 일론 같은 사람들이 회사 하나를 넘어 여러 일을 하게 될 거라는 페이팔 출신의 말을 전하자, 그는 중국을 가리킨다. 중국이나 한국의 창업자들은 회사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제국을 꿈꾼다. 2010년에 휴대폰으로 시작한 샤오미는 지금 포르쉐를 능가하는 차를 만든다. 희귀한 창조적 인간들이 이런 도구를 손에 쥐면, 과거의 한 사람이 할 수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걸 하게 될 것이다.
그럼 AI를 어떻게 보느냐. "우리는 그 얘길 별로 안 해요. 저는 기술자가 아니고 AI 전문가도 아닙니다." 그렇게 미래를 잘 봤던 사람이 왜 그러냐고 하자, "너무 후하시다"고 물린다. 인정하는 건 하나다. 회사가 요즘 AI 기업들만큼 빨리 클 수 있으리라곤 자기도 남들도 상상 못 했다는 것. 오래전 톰 시벨이 회사를 100억 달러쯤에 팔고 나서 아쉬운 듯 말한 적이 있다. "100억 달러가 큰돈이던 시절이었지." 지금은 페이스북이나 구글 상장을 두고 "1,000억 달러가 큰돈이던 시절"이라 말하게 됐다. 여섯 살짜리 회사가 수조 달러라니. 아무도 상상 못 했다.
"핵폭탄이 처음 터졌을 때도 아마겟돈이 예고됐습니다. 백 년 가까이 지났는데 안 왔어요. 1970년대 유전학 혁명 때도 과학자들이 '지구를 걸을 자격이 있는 인간'을 골라 만들 거라 했죠. 그것도 안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희망적이다. 특정 업종에 엄청난 혼란이 올 건 확실하지만, 잃는 것보다 많은 일자리가 생길 거라고 본다. 이번엔 다르다고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지난 두세 세기 동안 큰 기술 진보가 장기적으로 고용을 줄인 적은 없었다. 불황과 업종의 붕괴는 있었어도 전체 고용은 늘었다. 지금은 분류할 이름조차 없는 일자리들이 생길 것이다.
패트릭이 덧붙인다. AI가 글을 이렇게 쉽게 쏟아내니 오히려 뛰어난 글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쓰레기의 바다를 가르는 글의 가치가. 뛰어난 글이 뭐냐고 묻자 모리츠는 한 문장으로 답한다. "저자의 목소리가 틀림없이 들리는 것." 어떻게 그렇게 쓰느냐고 묻자, 그건 인생을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자기 안의 느낌과 목소리에 충분히 닿아서, 그게 남들의 기대가 주는 압력을 이기게 두는 것. 패트릭이 조지프 캠벨을 인용한다. 일생의 특권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제가 그만큼 영리해서 그 말을 했더라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는 아직 내가 되지 못했다
패트릭당신 인생에서 당신 자신이 되는 데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요.
모리츠저는 아직 그걸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패트릭왜요? 당신과 당신 자신 사이에 남은 장벽이 뭔가요?
모리츠제 약점, 많은 약점 중 하나인데요. 저는 늘 바깥의, 남들의 기대와 압력에 맞추려는 쪽으로 너무 기울어 있었어요. 저를 자유롭게 풀어 두기보다는.
패트릭남은 인생의 목표가 그건가요?
모리츠해 볼게요.
패트릭이 말문이 막힌 듯 묻는다. 이렇게 자기 인식이 또렷한데, 스스로에게 주는 점수는 객관적으로 틀려 보일 만큼 낮다고. 그게 뭐냐고. "모르겠어요. 어쩌면 어머니의 유령이겠죠." 어머니에겐 많은 걸 빚졌다. 예술에 대한 관심도 어머니가 심어 줬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흠을 찾았다. 뭘 얼마나 잘했든 어김없이. 야후가 상장하고 영국 신문에 모리츠 기사가 났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사기꾼이라고 확신했다. 경찰이 잡으러 와야 한다고. 그런 일에 관여하고도 합법일 리가 없다고.
패트릭아팠나요?
모리츠아니요. 그때쯤엔 재미있었어요.
패트릭어릴 땐요? 뭘 해도 만족을 못 드렸다는 게.
모리츠그건 그냥 삶의 사실이었으니까요.
패트릭그런데 그게 지금까지 울리는 것 같네요.
모리츠네. 사람에게서 소년을 꺼낼 수는 없죠.
마지막 질문들
세쿼이아에서 물러난 뒤의 삶은 어땠나. 그는 먼저 원칙을 말한다. 지도자는 어슬렁거리면 안 된다. 이끌지 않기로 했으면 비켜야 한다. 그래서 단칼에 끊었다. 도울 수 있는 건 개인 기여자로 도왔지만 지도부로는 아니었다. 회의실에 남아 미적거리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봤다. 자기가 그런 걸 겪어 봤으니까. 세쿼이아를 운영할 땐 그것 자체가 편집광적 몰두였다. 매일, 일주일 내내,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이제 다른 것들을 한다. 글을 쓴다. 아내와 25년 전 만든 재단에 시간을 더 쓴다. 50년 가까이 산 샌프란시스코를 되살리는 일에 나섰고, 공동창업자 그리프 개프니와 함께 지역 언론 '샌프란시스코 스탠다드'를 만들었다. 비영리로 하지 않았다. 지역 저널리즘이 돈이 되는 사업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뉴스엔 사주의 손가락을 얹지 않는다. 본인이 기사에 언급될 때 스스로 쓸 것 같지 않은 방식으로 다뤄져도 그건 공정한 게임이다. 다만 의견 면은 중도에서 약간 우파. "샌프란시스코에 꼭 필요한 목소리죠."
할 일은 많고, 채워지는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다. 한 가지에 미친 듯 몰두하는 게 아니니까. 그립냐고 묻자 그렇다고, 어떤 면이 그립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건 확실히 안다. 몰입의 상태가 그리운 거냐고 하자 그림에서 그걸 얻는다고. "그림은 더 단순해요. 시간을 어디 쓸지 결정할 필요가 없죠. 달력을 남이 지배하는 것과 내가 완전히 쥐고 있는 것의 차이는 밤과 낮입니다."
책을 덮고 남은 게 결국 육아였다는 패트릭의 고백에, 아이가 열둘과 열이라는 말에, 모리츠는 짧게 답한다. "아이에게 자신감을 무장시켜 주는 것. 그게 답니다." 어떻게요? "육아 편람은 제가 잘 모릅니다. 다만 자신감과 자유를 심어 주고, 부모로서 비난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리고 진보를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된다는 교훈에 대해선 이렇게 말한다. 지난 천 년 동안 러시아, 중국, 이란, 아프리카, 인도에서 수백만 명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건 아주 얇고, 짐승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남는 게 모두의 과제라고.
다음 책은 뭘 쓰겠느냐. 그는 이상하게도 1940년대 이란, 페르시아에 끌린다고 한다. 이란 안팎의 인물들이 충돌한 그 시기가 오늘의 세계를 너무 많이 설명한다는 것.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과 논픽션을 섞은 형태를 생각 중인데, 서사와 구조를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그가 보기에 이란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충돌이다.
가족사를 파고들어 가장 크게 바뀐 건? "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습니다." 조금? "조금." 결국 무엇이 중요한가? 두 가지라고 한다. 아끼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을 이뤘든 우리 모두 완전히 하찮다는 걸 아는 것. 그러면서 우리가 손대기 전보다 조금 나은 상태로 남겨 두려 애쓰는 것.
"누군가 당신에게 해 준 가장 친절한 일은 무엇인가요?"
"저와 결혼해 준 것."
"아내에게서 뭘 배우셨나요?"
"관용."
덮으며
이 대화에서 투자 얘기는 3분의 1도 안 된다. 그런데 모리츠가 창업자를 고르는 방식은 전부 앞부분, 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엌에 있다. 국가가 주는 안전을 믿고 남은 사람과 제 힘으로 살아서 떠날 수 있었던 사람. 그는 후자를 찾는다. 열네 살까지를 캐묻는 건 그 사람이 어느 쪽 천으로 짜였는지 보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남는 건 그가 자기 성공을 오늘로 옮겨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보 우위가 사라진 지 15~16년, 중개자가 너무 많아진 시장에서 "내가 다시 해도 잘할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전설은 드물다. 그래서 그의 AI 낙관도 겸손하게 들린다. 핵폭탄과 유전학의 아마겟돈이 안 왔듯 이번에도 일자리는 늘 거라는 것. 확신이 아니라 역사에 기댄 온건함이다.
마지막은 '여권'이다. 소수자가 불안한 시대에 도망칠 구멍을 두라는 말은 정치 논평이 아니라 생존한 집안의 가풍이다. 포트폴리오에도, 거주지에도, 정체성에도 두 번째 문을 남겨 두라는 뜻으로 읽힌다.
옮긴이 메모
- 인용은 의역, 수치는 원문 그대로. 72시간, 2,500년, 26시즌(1986~2013), 50년 전, 1985년, 1995년, 2012~13년, 25년 전 재단, 어휘 2,400과 4,500, 100억·1,000억 달러는 모두 발언 그대로다.
- '현관의 유모차' 문장은 모리츠가 이블린 워의 말로 소개했으나 일반적으로 시릴 코널리의 문장으로 알려져 있어 본문에 병기했다.
- 타임의 '올해의 컴퓨터' 호는 1982년 연말호(Machine of the Year)로 알려져 있다. 연도는 전사에 없어 본문엔 넣지 않았다.
- 책 제목·진행자 이름은 전사에 명시되지 않았다. 진행자는 대화 중 "패트릭"으로 불리고 프로그램명이 Invest Like the Best이므로 패트릭 오쇼너시로 표기했다. 회고록 제목은 적지 않았다.
- 정치 관련 발언(누가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오르반·패라지·르펜, 대통령 어휘)은 모리츠 개인의 견해이며 검증하지 않았다.
- 이 페이지엔 Chart.js 차트가 없다. 대화에 통계가 거의 없어 막대차트 대신 삽화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