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디스크의 부활
한 자릿수 멀티플에 방치돼 "수명이 다했다"던 HDD 업체들. AI가 데이터를 폭발시키자 갑자기 품귀가 됐고, 가격 인상까지 하면서 이익 체력이 몇 년 새 3~5배로 뛰었다.
"가치주는 사실, 아직 아무도 못 알아본 오해받는 성장주예요."
인텔 클린룸에서 칩을 만들던 재료공학 박사가 월가에서 하이퍼스케일러를 굴린다. 알저(Alger)의 대형주 전략을 이끄는 앙쿠르 크로포드는 AI 버블론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 그런데 그 논거가 뜻밖이다. "공급이 막혀 있는 게 오히려 축복"이라는 것.
알저(Alger) 부사장 · 대형주 캐피털 애프리시에이션 전략 co-PM · 집중투자 ETF 단독 운용
캔자스에서 태어나 중동에서 자랐고, 히말라야의 수도원 기숙학교를 거쳐 버팔로에 정착했다. UC버클리에서 기계공학·재료공학 복수 학위, 스탠퍼드에서 재료공학 석·박사. 인텔 박사 펠로십 수상자에 특허도 여럿 보유한 진짜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섯 살까지 케이프커내버럴 근처에 살며 우주왕복선 발사를 보러 다녔고, 오랫동안 장래희망은 우주비행사였다.
면접 날, 타호에서 막 돌아온 그녀는 폭우에 쫄딱 젖은 채 잔뜩 언짢은 얼굴로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타호엔 지금 눈이 온다는 거네요." 하필 CEO 댄 정도 스키광이었다. 스키 얘기로 시작된 대화는 인텔 vs AMD 토론으로 번졌고 — 인텔이 최정점이던 2003~04년에 그녀는 "인텔에서 일해봤는데, 내부 문화를 보면 AMD가 낫다"고 답했다 — 그날 저녁 지원자 모임에서는 낸드 vs 하드디스크로 CEO와 설전까지 벌였다. 행사장을 나서는데 댄 정이 말했다. "당신, 채용이에요. 나한테 겁먹지 않고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보게 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덧붙이자면 — "하드디스크는 0이 된다"던 댄 정의 주장에 대해 그녀는 최근 이렇게 놀렸다고 한다. "댄, 그 얘기 22년 전에 했잖아요. 맞히는 데 20년 걸리셨네요." 투자에서 너무 이른 건 틀린 것과 같다는 얘기다.
"알저에서 성장투자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정의부터 뒤집는다. 알저가 찾는 건 성장이 아니라 변화다. 변화가 있는 곳에 아직 아무도 값을 매기지 않은 기회가 있고, 성장은 그 변화가 낳는 출력값이라는 것. 그래서 "가장 빨리 크는 회사를 스크리닝하자"가 아니라 "변화를 찾자"가 이 하우스의 출발점이 된다. 갈래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고성장 초입 기업 — 매출이 빠르게 늘고 점유율을 쓸어담는, 우리가 아는 그 성장주다. 다른 하나가 알저를 독특하게 만드는 생애주기 변화(life cycle change)다. S커브를 다 타고 올라가 시장이 포화된 회사가 "우리는 아직 성장 기업인가, 아니면 있는 걸 짜먹을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는 순간 — 새 경영진, M&A, 규제 변화, 기술 수용 같은 계기로 성장 궤도에 다시 올라타는 쪽에 베팅한다.
S커브 초입에서 한 번, 정체 후 재점화에서 또 한 번 — "가치주처럼 보이는 후자가 사실은 미식별 성장주"
마이크로소프트가 ②의 교과서 사례다 — 사티아 나델라가 클라우드로 배를 돌렸을 때, 단기 실적은 눌렸지만 다시 10%대 중반 성장으로 복귀했다. 당시엔 "구글 시트가 엑셀을 죽인다"는 게 컨센서스였다.
물론 정체된 회사에 새 CEO가 왔다고 다 사는 건 아니다. 같은 잣대로 보고도 결론이 갈린 두 사례를 그녀가 직접 들었다.
한 자릿수 멀티플에 방치돼 "수명이 다했다"던 HDD 업체들. AI가 데이터를 폭발시키자 갑자기 품귀가 됐고, 가격 인상까지 하면서 이익 체력이 몇 년 새 3~5배로 뛰었다.
"가치주는 사실, 아직 아무도 못 알아본 오해받는 성장주예요."
시장 포화로 헤매던 상장 핀테크에 CEO·CFO가 통째로 바뀌고 근사한 신전략이 나왔다. 하지만 핵심 질문 — "이 전략으로 4~5% 성장이 12~15%가 되는가?" — 가 풀리지 않았다. 시장의 경쟁 압력이 그대로였기 때문.
"촉매는 있었지만, 궤도가 바뀐다는 논리가 서지 않았습니다."
이 확인 과정을 그녀는 "꿈을 꾸고, 가설을 시험한다(dream the dream, test the hypothesis)"고 부른다. 비전은 사줄 수 있지만, 실행이 숫자로 나오는지는 계속 검증한다는 것. 매도 기준을 묻자 답은 "전부 다"였다 — 더 나은 기회로의 교체, 목표가 도달, 기대 대비 실망. 다만 모든 매도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녀가 단독 운용하는 집중투자 전략은 완전 공개형 액티브 ETF다(방송에서 티커를 또박또박 불렀는데, 전사 기준 CNEQ로 들린다). 원칙은 단순하다 — 가장 큰 변화의 수혜를 받을 최고의 기업들만 담고, 비중은 리스크 대비 보상이 정한다.
꼭대기든 바닥이든 공통분모는 하나다. 큰 TAM(총주소시장). 비중이 작다는 건 확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때가 아니라는 뜻에 가깝다.
"소프트웨어가 소프트웨어를 쓰기 시작하면 혁신은 지수적이 된다"고 하셨죠. 무슨 뜻입니까?
말만 하는 게 아니다. 코딩을 모르는 그녀 자신이 주말 틈틈이 몇 달 만에 "꽤 그럴듯한 앱"을 바이브 코딩으로 만들었고, 현업 개발자들은 업무의 90%에 AI를 쓴다고 전한다. 알저는 이미 3년 전 「AI: 창조 비용의 하락」이라는 보고서에서 이 논리를 밀었다 — 소프트웨어 제작 비용이 0으로 가면 소프트웨어 산업의 해자 하나가 사라지고, 연 6조 달러 IT 지출의 절반을 차지하던 IT서비스·소프트웨어의 몫이 하드웨어와 네트워킹으로 이동한다는 것. 지난 3년의 주가는 대체로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금 컴퓨트가 부족하다면서요. 그런데 거품이라고요? 저는 그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AI 버블론에 대해
물론 트레이드 자체는 어려워졌다고 인정한다. 처음 2~3년은 "GPU가 닿는 건 다 금"이었는데, 이제는 에이전트가 CPU를 쓰고, 메모리 가격이 4배로 뛰고, 카펙스 예산이 불어나면서 ROI 질문이 전면에 나왔다. 중국 변수, 오픈소스 논쟁, 크레딧 스프레드까지 — 베어 케이스로 누를 수 있는 실이 갑자기 여러 가닥이 됐다. 그럼에도 그녀의 구조적 결론은 바뀌지 않는데, 근거가 흥미롭다.
연간 컴퓨트 투자 규모 (조 달러) — 오른쪽 막대는 그녀가 "그러면 과잉"이라고 말한 가상 시나리오
"내년이나 내후년에 3조 달러를 땅에 박으면 그건 과잉이다. 하지만 박을 수가 없다 — 전력이 없고, 사람이 없고, 칩을 그만큼 못 만든다." 수요는 4배씩 밀려 있는데 공급이 물리적으로 막혀 있으니, 시장이 스스로 과열을 제어당하는 셈. 그녀는 이걸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 부른다 — 일회성 폭발이 아니라 여러 해 지속되는 성장에는 시장이 높은 멀티플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딥시크 쇼크 때처럼, 중국 오픈소스 모델이 훨씬 적은 자원으로 비슷한 걸 해내면 3조 달러짜리 인프라가 필요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녀는 케냐 사파리에서 본 장면으로 답했다. 기린 목에는 늘 새가 앉아 있다. 새는 기린 덕에 얻어먹고 산다. 중국 모델은 기린 목에 앉은 새다 — 킴(Kimi) 같은 모델은 미국 프론티어 LLM의 출력을 증류(distill)해서 만들어지므로, 기린이 훈련에 카펙스를 태워줘야 새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중국의 혁신성과 "훌륭한 패스트팔로워" 역량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컴퓨트 수요의 종말을 뜻하진 않는다는 논리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 그녀만의 시나리오도 내놨다. 프론티어 랩들이 최신(N-1) 모델은 정부·기업 등 증류 우려가 없는 고객에게만 열고, 대중에는 두 세대 전(N-2) 모델만 공개하면 증류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 단, 프론티어 랩 전원이 합의해야 성립하는 구조라 본인도 실현 가능성엔 물음표를 달았다.
2000년의 과잉은 꿈은 있는데 인프라가 없어서 생겼다는 게 그녀의 정리다. Pets.com은 "훌륭한 아이디어였는데 그저 너무 일렀을 뿐"이고 — 실제로 그 아이디어는 츄이(Chewy)가 돼서 성공했다 — 당시엔 전화 접속 모뎀으로는 생산성이 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은 반대다. 인터넷이라는 기반은 이미 다 깔려 있고, 모자란 건 칩과 데이터센터뿐이다. 그래서 설령 과잉 구축이 생겨도, 유비쿼터스 지능에 대한 수요가 그 과잉을 소화해낼 거라는 게 그녀의 판단. "베어들이 뭘 틀리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셋 다라면서도 하나를 꼽았다 — 지속 기간(duration). 이 사이클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를 시장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들은 직원들에게 토큰 사용량 리더보드를 만들어 "누가 제일 많이 쓰나" 경쟁을 시켰다. 그녀의 비유로는 "점심값 제일 많이 쓴 직원에게 상 주기". 한 회사는 그렇게 연간 AI 예산을 한 분기 만에 다 태우고 "ROI가 안 나온다"고 했다 —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그 회사는 지난주 "AI 때문에" 직원 10%를 내보냈다. 진행자 배리가 "그건 AI 때문이 아니라 경영진이 인센티브를 잘못 설계한 것 아니냐"고 받아치자 그녀도 웃으며 인정했다. 요지는 이렇다 — AI는 꽂으면 돌아가는 기술이 아니라 배우면서 익혀야 하는 기술이고, 지금 보이는 건 실패가 아니라 학습 곡선의 헛발질이라는 것. 우버처럼 진짜 생산성으로 인력을 줄이는 회사와, 과잉 채용을 AI 핑계로 정리하는 회사는 구분해야 한다.
캔자스, 중동, 히말라야, 버팔로를 거친 성장기는 그녀에게 한 가지 감각을 남겼다 — 경영진의 톤에는 문화가 배어 있다는 것. 러시아 출신 CEO가 이끄는 한 보유 기업(음성 전사가 뭉개져 사명은 불명확하다)의 CEO는 지독하게 겸손해서 잘되는 얘기는 절대 안 하고 문제점만 늘어놓는데, 많은 투자자가 그걸 듣고 발을 뺀다. 그녀는 반대로 기회로 읽는다. 자랑하지 않는 게 그 사람의 문화일 뿐이니까.
TSMC에는 반대 방향의 경험이 있다. 수년간 "선단공정 단독 공급자가 될 텐데 왜 가격을 안 올리느냐"고 물을 때마다 "우리는 고객을 섬긴다"는 답만 돌아와 당시엔 꽤 답답했다고. 모리스 창이 심어놓은 철학이었다. 그런데 결국 TSMC는 가격을 올렸고, 사업의 우수함은 숫자에 반영됐다. 교훈은 명확하다 — 먼저 사업을 알아야, 경영진의 톤을 문화 보정해서 들을 수 있다.
신입 시절부터 실수와 교훈을 공책에 적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레이 달리오가 『원칙』을 쓴 방식과 같다는 배리의 지적에 반색했다.
"고객 돈으로 틀리는 건 시험 망치는 것과 차원이 달라요. 그 아픔이 사람을 만듭니다."
최애 책은 애덤 그랜트의 『싱크 어게인』. 가설을 쥘 만큼의 확신과, 가설을 버릴 만큼의 겸손을 동시에 가지라는 메시지가 이 업의 본질과 닿아 있어서다.
"테제에 묶여버린 사람들이 결국 트레이드의 반대편에 서게 되죠."
"20년 전의 자신에게 뭘 알려주겠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녀는 아무것도 안 알려주겠다고 답했다. 가장 아팠던 순간들이 가장 큰 스승이었기 때문에.
"넘어져 봐야 아픈 걸 알아요. 애들이랑 똑같죠. 그 흉터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고요."
마지막으로, 시장이 얘기하지 않지만 해야 할 주제를 묻자 그녀는 수익률이 아니라 AI의 인류 순편익을 꺼냈다. 지금 구조로는 불가능한 보편 의료를 AI가 비용을 꺾어 가능하게 만들 수 있고("10년쯤 걸리겠지만 된다고 본다"), 대학에 가서도 글을 못 읽는 아이들을 만드는 교육 시스템의 실패도, 기후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것. "데이터센터를 내 뒷마당엔 안 된다는 분들은, AI가 인류에 돌려줄 것들을 빼고 계산하고 있다"는 게 이 테크노 낙관주의자의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