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지만 주머니에
성냥은 있다
금리는 높은데 주가는 오르고, 미국 금리가 높은데 달러는 약하다. 이 이상한 조합의 이름은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 52페이지짜리 KB 월간전략, 핵심만 재미있게 뜯어봤다.
30초 요약
- 결론부터 — 9월 주식비중 96%(소폭확대)로 출발. 코스피 밴드 6,000~8,300pt. 단, 유동성형으로 바뀌는 낌새가 보이면 언제든 확대로 올릴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게 핵심.
- 지금은 신뢰형 — 미국 재정 불신이 만든 "금리↑ + 달러↓ + 금↑" 조합. 근본 해결은 어렵지만, 이 정도 금리면 웬만한 불확실성은 이미 가격에 들어갔다.
- 성냥 = 남은 카드들 — 국채 바이백, FIMA 레포 한도 확대, 유사 QE, 은행규제 완화… 11월 중간선거 전까지 금리안정 카드가 집중될 시기. 2022년 영국처럼 짧은 '금리↓ 주가↑' 구간이 열릴 수 있다.
- 업종은 양다리 — 신뢰형이 이어지면 방어력 보여준 업종(에너지/화학·음식료·보험), 유동성형으로 바뀌면 이익모멘텀이 반도체보다 빨라지는 업종. 두 관점의 교집합에 베팅.
숫자로 먼저 보기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가 뭔데?
화폐의 신뢰가 흔들릴 때, 공급이 고정된 자산(금·코인)으로 돈이 도망가는 현상이다. 원조는 무려 16세기. 헨리 8세가 국고가 비자 은화에 구리를 섞기 시작했는데, 은도금이 닳으면서 동전 속 초상화의 콧등부터 구리가 벌겋게 드러났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구리코 영감(Old Coppernose)". 백성들은 곧바로 좋은 옛날 동전은 장롱에 숨기고 나쁜 새 동전만 썼다. 500년 전에도 시장은 정확했다.
은 함량 92.5% → 25%까지 추락. 신뢰를 잃는 건 순식간이고, 회복(1551년 10월 92.5% 복원)에는 제도 개혁이 필요했다 — 이게 이 리포트 전체의 복선이다.
같은 트레이드, 두 가지 얼굴
유동성형 😎
신뢰형 😨
지금 미국은? 재정적자에 발목 잡힌 신뢰형이다. 주가가 버틴다는 것 말고는 유동성형 증거를 찾기 힘들다. 그런데 KB의 포인트는 여기부터다 — 신뢰형이라도, 금리안정 카드가 쏟아지면 잠깐은 유동성형처럼 굴러갈 수 있다는 것.
2022년 영국: 실패했는데 주가는 반등한 이야기
"재정건전화는 실패해도, 대응책이 나오는 동안 시장은 반등할 수 있다" — 이 명제의 실사판이 2022년 가을 영국이다. 두 달간의 드라마를 보자.
트러스 내각, 450억 파운드 감세안 발표
부채비율 100%인 나라가, 재원 계획 평가(OBR 전망)도 생략하고 감세를 질렀다. 시장의 해석: "조달 방법도 모르겠고 부채가 어찌 될지도 모르겠다는 뜻이네?" → 국채금리 급등, 파운드 폭락.
영란은행, 긴급 장기국채 매입
물가 잡으려고 금리 올리던 중앙은행이 손바닥 뒤집듯 국채를 사들였다. 금리는 단기적으로 눌렀지만, 근본 원인(재정 불신)은 그대로.
감세안 철회
백기 투항. 시장이 이겼다.
트러스 총리 사임 → 시장 '잠시나마' 안정
금리가 내려오고 FTSE는 반등했다. 이 구간이 바로 '약한 유동성형' 트레이딩 기회였다.
그래서 영국 재정은 건전해졌나? 아니.
재정수지는 지금도 -5%대. 수낙도 재정준칙 복원을 외치다 20개월 만에 하차했다. 건전화는 실패했지만, 트레이딩 기회는 실재했다 — 이게 교훈이다.
그리고 미국은 영국보다 쓸 수 있는 카드가 훨씬 많은 나라다. 이미 일본 외환 공조·국채 바이백을 시작했고, 남은 패로는 FIMA 레포 한도 확대(외국 중앙은행이 미국채 안 팔고 달러 빌리게 하는 장치), Operation Twist, 유사 QE, 은행규제 완화, 스테이블코인 등이 거론된다. 11월 중간선거 전이 이 카드들이 집중될 시기다.
어둠의 실체: 눈덩이 적자와 식물 의회
왜 '어둡다'고 하는지도 봐야 공평하다. 미국 의회예산처(CBO)가 관세 환급 때문에 적자 전망을 확 키웠고, 중간선거가 분점의회로 끝나면 재정 확대도 건전화도 못 하고 셧다운 교착만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10년물 4.3% 가정으로 계산한 숫자라, 지금 금리라면 FY2027 이후 적자는 더 커질 판. 여기에 엔비디아의 GPU 담보 금융·서버 가격 15% 인상 통보 같은 뉴스가 CDS 프리미엄을 계속 건드리고 있다.
업종 전략: 양다리가 정답이다
신뢰형이 이어져도(고금리·텀프리미엄), 유동성형으로 바뀌어도(이익모멘텀 장세) 다 통하는 교집합을 찾는 게 이번 달 숙제. 7월(하락장)과 8월(반등장), 방향이 정반대인 두 달을 모두 이긴 업종이 힌트다 — 에너지·화학·비철·건설·방산·운송·화장품·보험. 그리고 유동성형이 와도 5~6월처럼 반도체만 달리는 장은 아닐 거라며, 이익모멘텀이 빨라지는 보험·전력·운송·배터리를 같이 본다.
에너지 / 화학
신규주문 견조 + 유가 상방 제한 = 가격전가 가능. 3년 넘게 시장에 진 업종이라 바닥에서 주울 만하다(3년 이상 진 경기민감 업종이 반등 못 한 사례는 거의 없음).
음식료 / 의류
방향이 달랐던 7·8월을 모두 이겼다. 고금리·텀프리미엄 변동성에 대한 검증된 방탄조끼.
보험
이익모멘텀 가속 중 + 텀프리미엄발 고금리의 몇 안 되는 수혜자. 2006년 상반기에도 텀프리미엄 급등 때 수혜가 보험에 집중됐다(장기금리↑ = 미래 보험부채의 현재가치↓). 은행은 이런 장에서 중립이다.
조선 · 자동차 · 통신서비스
이번 달 컨셉(테일리스크 방어 or 이익 상향 가속)에서 밀리는 쪽.
흔들릴 때 보이는 것들: '덜 빠진 놈' 말고 '예상보다 강했던 놈'
7~8월은 사이드카만 20번 터진 극단의 시장이었다. 재미있는 건 — 몇 번의 극단일이 두 달 성과를 통째로 뒤집었다는 것(극단일 포함 vs 제외 수익률의 R²가 겨우 0.20). 반도체가 대표 사례다: 7~8월 누적 수익률은 전 업종 꼴찌인데, 극단일만 빼면 2등이었다. 그리고 옵션시장엔 아직 '한 방'에 대한 보험 수요(먼 OTM 풋 프리미엄)가 남아 있다. 그래서 종목은 이렇게 거른다.
극단일에 베타 대비 강했나 (양방향)
저베타라 덜 빠진 건 실력이 아니다. 베타 1.5짜리가 -6% 빠질 자리에서 -3%만 빠졌다면 그게 진짜 방어력. 하락일엔 예상보다 덜 빠지고 상승일엔 더 오른(잔차수익률 양수) 종목만.
이익 전망이 빠르게 상향 중인가
반전: 이 종목들은 싸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쌌다. 시장은 이제 '싼 가격'이 아니라 '올라오는 이익'을 산다. 2분기 실적시즌부터 쇼크(-20%~)엔 주가가 빠지고 서프라이즈(+50%~)에만 오르는 차별화가 시작됐다.
외국인이 사고 있나
외국인은 한국 증시 전체를 순매도하면서도 이 종목군은 상대적으로 사들였다(순매수 강도 +0.022% vs 그 외 -0.010%). 줄이는 와중에 골라 담는 종목 — 그게 신호다. 업종으로는 상사/자본재·에너지·기계·화장품 비중이 높았다.
"비싼데 강했다"의 정체 — 가격 할인이 아니라 이익 상향 속도가 방어력을 만들었다. (중앙값 기준)
AI 순환금융: 복잡해지는 건 맞는데, 아직 끝은 아니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의 곳간(내부현금흐름)이 마르면서 돈 구하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선 AI 관련 12개사가 미국 전체 발행의 약 13%를 차지할 정도. 이제는 SPV·합작사가 데이터센터를 지어 하이퍼스케일러에 장기 임대하는 구조에, 사모신용과 GPU 담보 금융까지 등장했다. 엔비디아는 글로벌 운용사 6곳과 5,000억 달러+ AI 인프라 금융 플랫폼을 추진 중이다.
그래도 아직은 자기 돈(현금흐름)이 제일 크고, 그다음이 사모신용이다 (IMF 추정, ~2028년).
리스크 3종 세트
① 부외부채 착시 — SPV가 진 빚과 장기 리스·구매약정은 하이퍼스케일러 재무제표 밖에 있다. 겉보기 부채와 실제 부담의 간극이 커지는 중.
② 담보·수요의 집중 — 대출은 여러 갈래인데 담보는 죄다 엔비디아 GPU, 최종 수요는 소수 AI Lab. OpenAI+앤트로픽의 컴퓨팅 점유율이 이미 15~20%, 5년 뒤 80%까지 간다는 시나리오도 있다. 분산이 안 된 구조.
③ 변동금리 + 불투명성 — 사모신용은 대부분 변동금리라 금리가 오르면 바로 아프고, 중복담보(2025년 트라이컬러·퍼스트브랜즈 사태)처럼 문제는 유동성이 마른 뒤에야 드러난다.
신용보강이라는 이름의 보증 릴레이
SPV 신용이 약하니 대기업들이 뒤를 받쳐준다. 공시로 확인된 규모만 이렇다.
엔비디아 → OpenAI용 DC
PORTS-Pike 프로젝트 잔존가치·리스 관련 최대 신용지원
알파벳 → DC 사업자
리스 지급의무를 받쳐주는 크레딧 백스톱 (2026년 6월 기준 최대)
메타 → 루이지애나 JV
데이터센터 가치 하락 시 차액을 물어주는 잔존가치보증(RVG)
그래서 결론은? 무섭게 들리지만 KB의 판단은 "아직 정점 아님"이다. 근거: ① 사모 조달은 이제 막 본격화 ② 위험이 진짜 커지는 단계인 '재증권화'(같은 담보로 상품을 겹겹이 쌓는 것)는 아직 미미 — 데이터센터 관련 ABS/CMBS가 전체의 약 2% 수준 ③ 은행 대출 여력도 남음 ④ 중간선거 전 금융완화 기대. 그래서 AI 산업엔 긍정 시각 유지. 단, 이 판 전체가 엔비디아 GPU와 소수 AI Lab 수요에 얹혀 있다는 건 계속 지켜봐야 한다.
챙겨갈 세 가지
- 시나리오를 이분법으로 두지 마라 — "재정위기 = 폭락"이 아니다. 위기가 명확해지면 대응책이 나오고, 대응책이 나오는 구간엔 (영국처럼) 반등장이 선다. 9월~11월이 그 대응책 집중 구간.
- 종목 고르는 기준을 바꿔라 — 싸다고, 덜 빠졌다고 사는 게 아니라: 극단일에 베타 대비 강했고 + 이익 전망이 빨라지고 + 외국인이 담는 종목. 업종으로는 에너지/화학·음식료·보험 (픽: SK이노베이션, 삼양식품, 빙그레, 현대해상).
- 주주환원은 '꾸준함'을 사는 것 — 애플도 TSMC도 규모가 아니라 "안 좋을 때도 지킨다"는 신뢰가 리레이팅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3년 연속 자사주 소각 기업 리스트부터 볼 것.